브릭스 정상회의, 새 국제 결제 시스템 제안했지만…
‘카잔 선언’에서는 언급이 없어
‘무역절차 단순화’ 포함돼 눈길
투자플랫폼·곡물거래소도 추진
달러화를 대체할 국제 결제 시스템은 가능할까? 러시아 타타르스탄공화국 카잔에서 최근 열린 브릭스(BRCIS) 정상회의가 새로운 경제·금융 시스템 창설을 화두로 꺼내면서 현재의 달러화 중심 국제 결제 시스템에 변화가 올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
브릭스의 규모와 영향력으로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출발이긴 하지만, 브릭스라는 경제연합체가 갖고 있는 한계와 달러화를 대체할 통화 시스템 구축의 어려움 등으로 실현 여부에는 물음표가 달린다.

(카잔=AP/연합뉴스)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브릭스, 새 경제·금융 시스템 논의 = 이번 카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제기된 많은 의제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새로운 국제 결제 시스템 제안이다.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지우마 호세프 신개발은행(NDB) 총재가 “달러가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고 발언하자 “실제로 그렇다”고 동의하면서 달러가 정치적 수단이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러를 이용하는 것은 달러의 신뢰를 떨어트리기 때문에 큰 실수”라고 지적하고 “우리는 달러를 거부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지만, 달러와 함께 일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도 “브릭스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발휘해 재정·금융 협력 심화와 금융 인프라 상호 연결 촉진, 높은 수준의 금융 안보 수호, NDB 강화에 나서고 국제 금융 시스템이 세계 경제의 구조 변화를 더 잘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건강 문제로 카잔에 방문하지 않고 화상으로 정상회의에 참석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도 브릭스 국가들만의 대체 결제 수단을 만들 때가 됐다고 거들었다.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으로 인한 서방의 각종 제재로 경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러시아는 이번 회의에서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여러 시스템을 제안했다.
푸틴 대통령은 브릭스 국가들이 세계 경제에서 더 공정한 규칙을 만들고 국제 금융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도록 세계무역기구(WTO) 문제를 다루는 협의체를 만들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새로운 투자 플랫폼·곡물 거래소 설립 제안도 나왔다. 타스 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새로운 브릭스 투자 플랫폼 창설을 제안한다”며 “이는 우리 국가 경제를 지원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고 ‘글로벌 사우스·이스트’에 재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정학적 긴장이 계속 증가하고 일방적인 제재, 보호주의, 불공정 경쟁의 관행이 확대하고 있다”며 이런 환경 속에서 브릭스 국가들은 경제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브릭스 국가들이 세계 최대 곡물·콩·유지 종자 생산국들에 속한다며 브릭스 곡물 거래소를 설립해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가격을 형성함으로써 식량 안보를 보장하는 데 기여하자고 밝혔다.
나아가 귀금속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위한 별도의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브릭스 가입국 정상들이 회의 후 채택한 ‘카잔 선언’에도 새 투자 플랫폼과 곡물거래소 창설 계획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브릭스 국가 간 무역 절차를 단순화하고 금융 분야 협력을 강화하자는 내용도 들어있다.
●‘카잔 선언’에 담기지 못한 한계 = 하지만 러시아가 달러 패권을 흔들기 위해 추진할 것으로 전망됐던 브릭스 단일통화나 암호화폐 사용에 대한 언급은 카잔 선언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상 달러화를 대체할 새로운 통화는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경제 블록을 기준으로 보면 유럽연합(EU)이 단일통화에 성공한 사실상 유일한 사례인데, 유럽연합과 브릭스는 태생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가 불가하다. 브릭스보다 결속력이 강한 아세안이나 메르코수르도 단일통화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설사 카잔선언에 해당 내용을 포함시켰다 해도 ‘선언’과 ‘실현’ 사이엔 간극이 크다.
서방의 제재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축출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브릭스 결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SWIFT의 대안을 만든 적도 없고 만들 계획도 없다”면서 “하지만 결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브릭스 국가들이 자국 통화 사용과 각국의 자체 결제 시스템 사용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단일통화이든 새로운 국제 결제 시스템이든 브릭스 입장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회원국가들의 ‘동상이몽’에 있다. 브릭스 회원국은 공통분모가 약하고 회원국 사이의 갈등도 상당하다.
전문가들은 회원국 간 양자 회담이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특히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의 회담은 우크라이나와 한국에 이어 미국까지 북한이 러시아를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했다는 점을 공식 확인한 가운데 이뤄졌다.
중국은 북한의 파병과 관련해 “긴장이 완화돼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우려하는 분위기가 큰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북한이 파병을 대가로 러시아의 군사 기술을 이전받을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었다. 북러의 이 같은 움직임은 한미일 군사 협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중국에 큰 압박이 된다는 것이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 석좌는 NYT에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그들(중국)에게 좋은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이 양자 회담에서 이에 관해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시 주석은 이날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분쟁의 지리적 범위를 확장하지 않고, 제3국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으며, 당사국에 기름을 끼얹어 적대감을 키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사태를 조기에 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시 주석과 모디 총리의 만남도 양국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카네기국제평화기금의 스튜어트 패트릭은 NYT 인터뷰에서 “데탕트(긴장 완화)는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되지만, 이들의 지정학적 경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며 “인도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중국으로 대체할 생각이 없으며, 브릭스가 반서방 블록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짚었다.
이날 브릭스 정상들이 채택한 ‘카잔 선언’ 역시 수위가 신중하게 조절된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입장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절반 이상의 성공’ = 이런 한계에도 불구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는 주최국인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정상회의에 36개 국가와 6개 국제기구가 참가했으며 참가국 중 22개국은 국가 원수가 직접 참석할 정도로 영향력을 과시했다는 점에서다.
이는 러시아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 했던 서방의 제재가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푸틴 대통령도 이번 정상회의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면서 “우리는 전 세계 대다수 국가가 점점 더 브릭스를 진정으로 권위 있고 유용한 국제적 협력 기구로 보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관영 매체들도 이번 회의를 통해 드러난 ‘반서방’ 세력의 결집이 서방 국가들로 하여금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게 했다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서방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적었다.
새 투자 플랫폼과 곡물거래소 창설 계획지지, 회원국 간 금융협력 등을 골자로 한 카잔 선언의 채택도 성과로 평가된다.
브릭스가 우크라이나 분쟁과 중동 위기 등 국제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도 주목된다. 카잔 선언은 대화를 통한 우크라이나 분쟁의 중재와 평화적 해결에 주목하고, 가자지구의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세계 안정, 국제 평화, 안보를 보호·유지하기 위해 비확산과 군축을 강화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카잔 선언에서 브릭스 국가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세계 문제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려는 것과 유엔이 더욱 포괄적이고 대표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개혁하는 것을 지지한다며 ‘다극주의’를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무역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