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저 물가상승률이 실감이 안 나신다면
0.4%. 작년 한 해 소비자물가는 이만큼 올랐다. 통계청이 소비자물가지수를 산출하기 시작한 시점은 1965년. 54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이처럼 낮았던 적은 없었다. 연 2% 성장도 아슬아슬한, 이른바 저성장이 '뉴노멀'(New Normal)이 되는 시대여서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deflation)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들끓었었다. 경기 부진이 동반된 물가 하락은 우리 경제를 더 이상 반등할 힘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
무엇이 물가 상승률을 그렇게나 끌어내렸던 걸까. 공급 측 요인, 정책적 요인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와 닿지 않는다. 품목별로 보면 무(-25.1%), 감자(-24.1%), 딸기(-19.4%), 양배추(-18.4%), 파(-17.0%), 오렌지(-15.7%), 양파(-15.0%), 호박(-14.8%), 마늘(-14.1%), 파프리카(-12.5%), 배추(-11.8%), 등 과일, 야채 등을 포함한 농산물 가격의 낙폭이 눈에 띈다. 기록적인 폭염이 덮쳤던 2018년 대비 기상 여건이 좋았던 탓에 일부 농산물의 공급 물량이 넘쳐났다. 농산물값은 2018년에 8.1% 올랐는데, 지난해에는 3.0% 하락했다.
물가 역시 수요·공급의 원리를 따른다. 쉽게 말해 수요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공급이 늘어나면 물가가 하락하고 공급이 줄면 물가가 상승하는 것이다. 농산물은 통상 가뭄이나 태풍 등 기후 요인에 의해 공급량의 등락이 심한 편이기 때문에 물가에 영향을 준다면 공급 측 요인으로 묶이게 된다.
농산물 가격에 있어 작년 대비 '기저효과'(경제 지표 평가 시 기준 시점과 비교 시점의 상대적 수치에 따라 그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현상)가 컸다는 분석도 근본적으로는 공급 물량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급 측 요인 중 또 하나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원자재 가격이다. 석유가 대표적이다. 2018년 배럴당 69.7달러 수준이던 두바이유는 지난해 들어 10월에는 배럴당 69.7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에 더해 지난해에는 정부가 유류세도 낮췄다. 서민 부담을 덜고 내수를 진작시킨다는 취지에서였다. 휘발유(ℓ당 최대 123원), 경유(ℓ당 87원), 액화석유가스(LPG)·부탄(ℓ당 31원씩)에 대한 세율이 모두 낮아지면서 기름값 하락을 부추겼다. 이에 지난해 등유(2.5%)를 제외하고 자동차용 액화천연가스(LPG, -7.8%), 휘발유(-7.1%), 경유(-3.9%), 취사용 LPG(-2.7%) 등 가격이 모두 하락했다.
유류세 인하와 함께 또 하나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준 정부 정책이 있다. 무상 급식, 무상 교복 등 복지 정책이 바로 그것인데, 관련 품목의 가격 하락 폭이 꽤나 크다. 남자 학생복은 37.5%, 여자 학생복은 35.4%나 가격이 떨어졌다. 당초 올해부터 시행될 예정이던 고등학교 3학년 대상 무상 교육이 앞당겨지면서 고등학교 납입금이 13.5% 하락했다. 서울 등을 중심으로 무상 급식을 제공하는 초·중·고등학교가 늘어 학교급식비도 41.2%나 내렸다.
물가가 내린 것 투성이인데 체감 물가는 올랐다고?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구입 빈도나 지출 비중이 높은 품목들을 보면 가격이 오른 것들이 제법 된다. 쌀(8.4%)과 떡(7.6%), 빵(4.9%) 등 한 끼 식사로 때울 수 있는 음식들의 가격이 올랐고, 이밖에 우유(4.6%), 참기름(4.7%), 즉석식품(3.7%), 생수(5.1%), 소주(3.6%) 등도 마찬가지였다. 죽(7.0%), 김밥(5.5%), 치킨(5.2%), 떡볶이(4.3%), 라면(3.9%), 짬뽕(4.0%), 자장면(3.8%), 커피(2.6%) 등 외식 물가도 고공행진이었다. 특히 '국민 야식'이나 다름없는 치킨 가격은 2009년(7.5%)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다.
이외에도 택시료(12.4%), 가정용비닐용품(11.0%), 샴푸(5.0%), 공동주택관리비(4.8%), 하수도료(4.4%), 자동차보험료(4.2%) 등 생활과 밀접한 품목들의 가격 상승률이 뚜렷했다. 또 마른오징어(14.7%), 비데(13.4%), 시외버스료(11.2%), 침대(10.6%), 소화제(9.2%), 이러닝(e-learning) 이용료(8.4%), 한방약(8.2%), 피부질환제(6.8%), 이유식(6.6%), 세차료(6.3%), 아동화(3.7%) 등의 가격이 뛰었다.
개개인의 소비 생활에 따라 체감 물가는 다를 수 있다. 밥을 해 먹기보단 사 먹거나 주문해 먹는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는 만큼 외식 물가 상승을 체감하는 쪽이 다수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통계청에선 가구의 소비 구조를 고려해 품목별로 지수에 반영되는 가중치를 달리 두는데, ▲전세(48.9) ▲월세(44.8) ▲휴대전화료(36.1) ▲휘발유(23.4) ▲공동주택관리비(19.0) 등 상위 5개 품목에 비하면 가격이 오른 품목의 가중치는 미미한 수준이다. 상위 5대 품목의 상승률은 공동주택관리비(4.8%)를 제외하면 0.2%, -0.4%, -3.3%, -7.1% 등으로 모두 낮았다.
정부는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까지 오를 것이어서 디플레이션(경제 침체로 이르는 상품·서비스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는 농산물과 석유 가격이 충분히 오를 것을 전제한 예측이다. 기저효과를 고려하면 이 같은 예측은 무리가 없을 수 있다.
다만 올해에도 예상치 못한 요인으로 농산물 공급이 출렁이거나 국제유가가 급등락 하는 일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 소비자물가지수뿐 아니라 생산자물가지수, 수출입물가지수, 임금, 환율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분기 연속 하락(전년 동기 대비)하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상황이어서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라는 얘기다.
이필상 서울대 경제학부 초빙교수는 "GDP 디플레이터의 흐름을 보면 물가가 구조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물가가 장기간 하락하면서 생산과 투자가 위축되고 연이어 성장률과 고용 지표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는 디플레이션의 덫에 빠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짚었다.
[뉴시스 제공]